2009년 11월 09일
레이몬드 카버와 나의 잘못된 독서습관
나는 레이몬드 카버를 매우 좋아한다. 학교를 다닐 때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도 일 년에 한 번쯤은 꺼내어 읽어보는 편이다. 주로 내 의식이 많이 무뎌졌다거나 글을 쓰면서 도무지 적합한 문장을 골라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에 꺼내서 읽어본다. 덜어내고 덜어내서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경제적인 문장들은 항상 나에게 자극이 되어주었고, 소설의 문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압축을 거쳐야 하는지 새삼 알게 해준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날리고 있는지 확인해 절망하고, 또 경계심이 생겨나게 된다. 올해도 역시 그의 소설을 다시 읽게 될 정도로 해이해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읽은 후에 쓴 소설의 제목은 ‘악의’였다.
나는 그가 사람이 가지는 ‘악의’에 대단히 민감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이 악의를 품는 순간을 마치 날카로운 메스로 도려내듯이 정확하게 포착하여 나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짙은 비린내가 나는 싱싱한 악의가 있었다. 너무도 정교하게 잘려 내 앞에 들이미는 통에 나는 마치 내 자신이 가진 악의를 보듯이 소름이 끼쳤다. 대성당에서 그는 그제까지와는 다르게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과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집 안에도 악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악의 끝에는 항상 카버가 내미는 화해의 또는 이해의 손길이 있다. 대성당 이전까지 그의 인물들끼리 소통을 거부했다면, 이 작품집에서 그는 아주 작은 소통의 실마리를 남겨두는 것이다. 그것이 악의를 느끼는 당사자들 간의 소통일 때도 있고 때로는 작가 자신이 인물들에게 남겨두는 여지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변화가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감도 있었지만, 그래서 이 작품집의 작품들이 빛나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그 와중에서 그러한 변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이 제일 좋다. 내가 읽은 단편소설 중에서 제일 좋은 축에 속하는 작품이다. 아오, 할 말이 이거 밖에 없다. 매일 한 단편 소설만 읽고 살라고 하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을 정도다. 매일 읽고, 또 읽고, 또또 읽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책을 참 못 읽는다. 읽고서 좋다, 나쁘다는 느낌도 있고, 어떠한 작품인지 대충은 감이 잡히지만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라고 하면 도무지 설명할 방법을 못 찾는다. 사회적인 의미나 기술적인 방법 또는 내재적인 의미 같은 것을 말하는 법도 모르거니와 말하다보면 어쩐지 맥이 풀려버려 제 풀이 지쳐서 관두기 일쑤다. 나에게 좋은 소설은 그냥 좋은 것이다. 와아, 어떻게 이렇게 썼지? 세상이 이런 작품이? 그런 느낌뿐이다. 그것은 나의 빈곤한 어휘력과 난감한 독해력 그리고 얕은 독서량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특히나 좋은 소설에 대해서는 더 말하기가 조심스러워 진다. 말하다보면 내가 그 작품을 망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내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해서 이딴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폼을 잡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헷갈리기 때문이다.
단지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이러한 스타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짐작뿐이다. 언어를 통한 독자와의 소통은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카버는 그 소통의 여지를 늘리기 위해서 이토록 작고 단단한 문장들로 이야기하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쓰면서 그가 어떻게든 한발자국 더 다가오기 위해 가졌을 강박증에 대해 상상한다. 그의 문장들은 정말로 위대하다.
# by | 2009/11/09 19:21 | 나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