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9일
농담과 아이러니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나는 절대로 그처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망감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경외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따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보통 수록된 단편 소설 중에 하나의 제목으로 소설집의 표제를 정하건만 김연수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말로 소설집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왜 그런가는 소설집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는 소설집을 통틀어서 재현이라는 행위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소설가는 결국 세계를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완벽한 재현’이라는 것은 없으니까. ‘뿌넝숴’의 화자를 보자. 그는 손가락이 두 개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전쟁 기피자라는 멸시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몸에 ‘기록’된 손가락 두 개의 ‘부재’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기록되어지지 않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어떠한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애초에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에 나온 그가 가보지 못한(않은) 곳이다. 결국 우리가 주목해야할 지점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있는 것들이며, ‘없었습니다.’와 ‘후회는 없어.’ 사이의 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간극이다. 그 간극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다. 소설가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저열한 상상에 때문에 색줄멸은 가장 먼 해변까지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골든 마운틴이라고 믿으며, 미국인들은 평양의 왕릉이 순금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에 침략을 감행하고, 브룩스는 스티븐슨을 고용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저열한 상상이 끝나는 지점에 바로 ‘이처럼 멋진 하늘’이 있다. 스티븐슨은 그의 고용인인 브룩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총칼을 앞세우고 여기로 찾아온다고 해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우리를 찾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인데,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 귀하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결국 김연수가 이 소설집에서 찾아낸 재현의 방법은 농담과 아이러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나무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천연기념물이 된다니 그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백송이여, 그런 것도 농담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그러한 역사와 기록의 세계를 대하는 김연수의 방식은 이렇다.
백송 사이를 지나온 빗물이 내 얼굴로 떨어졌지만, 그래서 부릅뜬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 육백살이 넘은 천연기념물과 이제 고작 서른네살이 된 따분한 인간, 둘 중 누구의 농담이 더 웃긴가 따져보기로 했으니까.
애초에 우연과 가정으로 점철된 세계는 기록되어짐으로 해서 역사가 되고 당위성을 얻는다. 그리고 그 기록의 과정에서 소실된 지점에서부터 소설가는 쓰기 시작해야 한다. 거기에서 김연수가 찾아낸 것은 농담과 아이러니다. 그러한 눈을 가지게 될 때까지 김연수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고, 얼마나 적은 글을 썼을까.
# by | 2009/10/19 18:42 | 나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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